추억장치라는 부제에 쓰인 추억이란 단어는 '슬픈 추억'정도의 말로는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과거의 일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그버리지 함장이 들여다보던 스마트폰 속의 어린 자신과 오빠가 같이 찍힌 사진. 라이에 눈 앞에 그의 아버지를 앗아간 닐로켈라스를 보여준 연습용 프로그램. 마리토 대위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진실을 억지로 상기시킨 의료용 프로그램. 마지막으로 공주의 교살시도에 쓰인 슬레인의 목걸이. 9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다양한 소품들이 전부 추억장치인 셈입니다.
영어 부제는 darkness visible이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은 소설가 스타이런이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을 때에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던 정신적 고통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보이는 어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지요. 9화에서 가장 크게 다뤄진 소재인 PTSD와 그 문제로 큰 고통을 겪는 두 등장인물의 처지를 표현한 부제입니다.
9화에서는 그동안 마리토 대위를 괴롭혀왔던 15년 전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기억은 시청자에게뿐만이 아니라 당사자인 마리토 대위에게도 들이대어집니다. 잠깐씩 컷신으로만 등장했던 마리토 대위의 기억에선 흄레이를 끌어내려고 하는 모습과 도저히 대항할 길 없는 적에 대한 공포가 떠오른 표정만을 볼 수 있었죠. 그러나 9화에서 그 날 무엇이 있었는지 전부 드러나고 마리토 대위가 그 기억을 마주한 것만으로 발버둥친 것은 마리토 대위가 그간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떠올리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토 대위를 조명한 다음엔 라이에로 카메라가 옮겨갑니다. 마리토 대위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눈 앞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라이에에겐 슬픔을 극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어머니에 대해서는 표현된 적 없으니 없으리라 생각하면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었을테고, 아버지를 잃은 뒤로는 잠재적인 적과 마찬가지인 지구인들 속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터놓고 말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그나마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공주마저도 (겉으로 보기에는)성공적으로 지구인들 사이에 섞여드는 걸 지켜봅니다. 그에 더해 라이에가 그나마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된 사람은 이나호가 유일한데 유키 준위는 라이에와 잉코 둘다 들으라고 바로 앞에서 이나호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어댑니다. 라이에는 이나호도 공주가 채어가버린 것처럼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실감이 찾아오죠. 여기에 연습 프로그램에서 본 닐로켈라스가 그녀의 정신에 쐐기를 박죠. 마리토 대위가 그랬던 것처럼 라이에 역시 닐로켈라스를 보고 아버지를 잃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으며 그 순간의 기억은 라이에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재생됩니다.
그런 와중에 샤워실엔 에델릿조와 공주가 들어오고, 둘의 대화는 라이에의 열등감과 상처를 더더욱 자극합니다. 라이에는 여기에서 충동적으로 공주를 교살할 생각을 품고 마는데 그 도구가 슬레인의 목걸이라는 사실은 추억장치라는 부제와도 맞물려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추억장치라는 부제와는 별개로 슬레인측의 이야기 역시 전개되는데, 자츠바움은 A파트에서부터 크루테오 경이 진정한 충신이며 자신이 반역자임을 슬레인 앞에서 밝혀 놀라게 했습니다.
9화에서 드러난 당당하고 직선적인 자츠바움의 성격에 미루어볼 때 그간 슬레인이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르니 죽이면 안된다라고 한 것은 크루테오 경에게 댄 이유일 뿐이고 실제로는 단지 슬레인이 트로이어드 박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슬레인을 굳이 속이지 않고 진실을 전부 말해준 것도 그 일환일 겁니다.
자츠바움이 밝힌 침략의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쾌합니다.
치킨이 먹고 싶어서너희가 가진 풍요로움이 탐나서 쳐들어갔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 No.1의 이유죠. 전쟁의 방아쇠가 되는 사건은 전쟁마다 다르기 마련이나 대부분의 전쟁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로 압축됩니다. 경제적인 이유.
약혼자도 죽었고 어쩌고 합니다만 그건 굳이 말하자면 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츠바움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일족의 영주로써 전쟁을 일으켰음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영지민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복수심도 충족할 수 있다. 이런 식이죠.
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핑계삼을 게 필요했는데, 올해가 제1차 세계대전이 개전한지 정확히 백년이 된 해입니다만 그 때처럼 우연히 사건이라도 터지면 그걸 빌미삼아 전쟁을 하겠지만 그런 게 때맞춰 터져줄리 없으니 직접 공주를 죽이기로 한 거죠. 자작극이라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인 예도 있습니다. 중일전쟁 같은 경우가 그렇죠. 슬레인이 거기에 대해 납득할리 없어 나이프를 들고 협박하지만 자츠비움은 그것 역시 황족의 자업자득이란 논리로 일축해버리고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으로 슬레인을 압도합니다.
이나호와 슬레인의 첫 만남을 기다릴을 때만큼이나 다음편이 기다려지는데, 라이에의 행동이 듀칼리온 내에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 기대해봅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드노아. 제로 11 (0) | 2014.09.18 |
---|---|
알드노아. 제로 10 (0) | 2014.09.12 |
알드노아. 제로 08 (0) | 2014.08.27 |
알드노아. 제로 07 (0) | 2014.08.21 |
알드노아. 제로 06 (0) | 2014.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