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스피어

 지구인이 화성인의 공습을 막기 위해 준비해왔을 작전은 화성인의 통신을 끊는다는 한 수에 어이없이 깨져버리고 그 뒤로 화성인들의 압도적인 전력이 화면을 메웁니다. 화성인의 압도적인 무력앞에 노출되는 것은 군대뿐만이 아니라 주인공 역시 포함되어 그들은 그 힘의 차이를 바로 눈 앞에서 목도하고, 급기야 친구까지 잃고 맙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평소와 같은 어조지만 속으로는 차가운 분노를 갈무리하고 있을 게 분명한 결의를 담은 대사를 꺼냅니다.

 싸우자.
 절망적인 전력차 앞이기에 더더욱 가볍게 말할 수 없는 그 결의를 말하면서 BGM이 깔리고 마지막 대사까지 끝낸 후 2화의 부제가 뜹니다.
 지구에서 가장 긴 하루.


 
 보통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는 첫 화부터 주인공이 로봇을 타고 적을 무찌르곤 합니다만 하지만 우로부치는 그런건 엿이나 줘버리라는 듯이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공이 로봇을 타는 게 그렇게 중요해? 아냐, 난 주인공이 로봇을  타는지가 더 중요해!
 오프닝 엔딩 떼면 20분 약간 넘는 시간이 주어지는 TV애니메이션에서 1화만에 주인공에게 로봇을 타는 이유까지 부여하기란 힘든 감이 있지요. 우로부치는 그런 클리셰에 집착하는 대신 쿨하게 내버리고 주인공의 동기를 부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기실 2화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를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1화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는 화였다면 2화는 주인공, 그 중에서도 이나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화였죠.
 이나호같은 타입의 캐릭터는 로봇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써는 잘 나오는 편은 아닙니다.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는, 아니 로봇 애니메이션 뿐만이 아니라 주인공이란 포지션은 감정을 화면 밖으로 확확 뿜어내는 쪽이 더 인기있으니까요. 이나호는 그에 반해 냉철하고 침착하며 적어도 지금까지는) 감정 표현도 하지 않죠. 나이가 어린 만큼 감정 표현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쪽에 더 가까울 거라고 보는데 정신적으로 몰려 가는게 분명할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런 주인공은 잘못하면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처럼 비춰질 우려도 있습니다만 아오키 에이 감독은 그렇게 비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들여 이나호를 조명합니다. 누나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만드는 장면이나 누군지 모를 여자아이 둘에게 다가가 충고하는 장면. 친구의 손을 이 악물고 잡고 있다가 놓칠 때의 표정. 차가 터널 안에서 멈춰섰을 때 차 위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장면. 이나호가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고 친절을 베풀줄도 알며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한 컷 한 컷 차분히 연출해냅니다.
 그렇게 이나호가 어떻게 '싸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 다음에서야' 이나호의 마지막 대사를 내보내고 2화가 막을 내립니다.

 우로부치 겐은 등장인물을 죽이는 걸로 네타화가 되서 그렇지 그가 쓰는 죽음이 비극적인 것은 이야기를 내실있게 닦아놓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먼저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거죠.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1화 - 2화 - 3화에 이르는 이 과정속에서도 우로부치의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ㅔㄴ: 성우 이야기인데. 이나호의 성우는 부담이 꽤 크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성우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에게 최종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직업이니까요. 감독이 성우에게 어떤 연기를 하도록 요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한된 연기 톤으로 이나호를 표현해 내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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